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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웨이는 마지막 영화작가이다.
제작된지 28년, ‘아비정전’으로 지금 도취되자
아이다 토지  × 고바야시 준이치

영화 관련 집필, 소설화를 담당하는 아이다 토지에게 아시아 영화에 대해 A PEOPLE 편집장이 질문해 나가는 대담 연재. 이번에는 13년만에 스크린에서 되살아나는 왕자웨이 감독의 ‘아비정전’ (1990・홍콩)에 대하여. 2월 9일 개최될 A PEOPLE 토크 이벤트의 테마로도 결정.

고바야시 준이치 (이하 고바야시) ‘아비정전’, 리바이벌이 결정되었습니다. 개봉된 1992년, 제가 이 영화를 본 건 아이다씨가 ‘굉장하다’고 떠들썩하게 평가하셨기 때문에(웃음). 이번에 보는 게 몇년만인가요. 인상은 바뀌었나요?

아이다 토지 (이하 아이다) 떠들썩했나요?(웃음). 오랜만이네요. 적어도 이번 세기가 되어 다시 보지는 않았지만, 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정서가 되살아난다고 하기보다는 지금 변함없이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바야시 에버그린(evergreen)인 작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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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예고편의 앞부분에 나오는, 시계가 있고 문이 닫히는 신이 있어요. 그 장면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이건 시간에 관한 영화입니다.
시간은 죽음을 향해 카운트다운해 나갑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 유한성을 태어날 때부터 우리들은 아마 알고 있고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시간을 쪼개 나갈 수 밖에 없어요. 그 안에 청춘이나 인생이 있고. 인생은 시간에 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을 쪼개 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 중, 미술도 라쿠고(落語)도 노(能)도 교겐(狂言)도 발레도 멋지지만, 영화가 가장 시간을 기록할 수 있어요. 영화 앞에 사진이 있었지만, 사진은 시간 경과를 기록할 수 없어요. 영화는 시간을 모사할 수 있습니다. 그 감각을 처음 느끼게 된 것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였습니다.
어째서 시간을 기록해야 하냐 하면, 죽기 때문에. 언제 죽을 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기록하고 싶습니다. 이는 사명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지요. 영원함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한순간을 영원하게 만들고 싶은.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 나타난 것. 그 무의식의 날개 같은 것을 펼쳐 나가고, 지금이 제7권인지 제8권인지 모르지만 거기에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죽습니다. 완결편의 마지막을 맞이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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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타이틀 ‘아비정전’의 의미가 잘 이해된 느낌이 듭니다. 요즘10년 이상의 시간을 거쳐 어떤 영화를 다시 돌아볼 기회가 자주 생깁니다.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도, 레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도, 로베르 브레송의 ‘돈’도 당시에는 영상이나 연출에 압도되었지만 지금 다시 보면 전부 굉장하게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비정전’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웃음). 라스트의 총격전에서야 겨우 영화처럼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츄에이션 밖에 없어요.

아이다 장소라고 생각되요. 기억이란 무엇일까. 냄새가 기억이라는 사람도 있고 미각이 기억이라는 사람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 기억이라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건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라면 젖은 길의 공중전화 같은. 고바야시씨가 시츄에이션이라고 해서 알아차렸지만, 이 영화는 수많은 1막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원 시츄에이션. 등장인물은 일치하고 조합이 달라지지만 1막극이 이어지는. ‘모든 기억은 1막극이다’라고도 말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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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무대 위에, 몇 명이 서있고, 스포트라이트가 닿은 2명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 같은. 이 스포트라이트가 옮겨 가는. 장소가 옮겨 가는. 이것이 하나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옴니버스나 군상극은 아닙니다. 굉장히 연극적이네요. 개봉 당시 ‘아비정전’에게 느낀 것은 ‘스타일리쉬한 영상’이란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그 정도의 영상파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다 모놀로그가 많아서 당시에는 문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고바야시씨가 말한 것처럼 혁신적인 비주얼리스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고 확신했지만, 왕자웨이는 각본가도 아닐 뿐더러 영상가도 아닙니다. 감각을 심어 나가는 사람이지요. 장국영이 장만옥에게 ‘자라’고 하잖아고 ‘자’면 ‘꿈에서 만날 수 있어’라고. 유덕화도 또한 장만옥에게 피곤하면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각된 것은 이 영화는 불면증 영화가 아닌가 하고. 덧붙이면 왕자웨이는 반은 자고 있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의. 꿈 같은 감각이지요. 현실이지만, 현실을 보면서 꿈을 꾸고 있다. 그런 감각을 심어 나가는 사람. 21세기에 고민하는 현대인에게 힐링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픔을 몽롱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